2022년 맨섬에서 열린 제19회 국제 언어학 올림피아드에 참가했던 권준혁이라고 합니다. 작년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저는 어느 날 유튜브 알고리즘의 인도를 받아 언어학 올림피아드를 다룬 한 영상을 보고, 한국 언어학 올림피아드에 응시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때 제 나이가 대회에 참가할 수 있는 가장 큰 나이이기도 했던지라, 당락에 상관없이 한번 도전해 보고 싶은 생각도 물론 있었습니다. 사실 신청할 당시에만 해도 제가 정말 본선까지 통과하여 맨섬 땅을 밟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KLO 내지는 APLO에서 당연히 떨어질 줄로만 믿고 있었지요. 방역 등의 이유로 인해 KLO가 비대면으로 개최된 점은 그래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대회에 함께 참가하였던 지인 몇 사람을 직접 볼 수 없었던 점이 매우 조금 아쉬웠지만, 비대면으로 치러진 만큼 더욱 편한 마음으로 대회에 참가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문제 중에 인상 깊었던 것을 꼽자면, 아삼어에 관한 문제였을 것입니다. 이제껏 말로만 들었던 ‘능격-절대격 언어’를 난생처음으로 접하게 된 계기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문제였던 훈민정음에 관한 문제도 다소 재미있었습니다. 대회가 끝나고 몇 주 뒤 받은 결과는 실로 예상 밖이었습니다.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인 만큼 큰 생각 없이 그냥 던져 보다시피 하는 마음으로 참가했던 대회였는데, 금상을 받았다는 게 아닌가요! 아마도 그 소식을 듣고 제가 처음 한 생각은 이러했을 것입니다. ‘이야, 야단났네. 이러다가 나, 진짜 가게 되는 거 아내?’ 그래도 여전히 ‘APLO에서 떨어지지 않을까?’, ‘내가 국제대회까지 진출할 리가 없어!’ 하는 회의감이 더 컸지요. 겨울 학교를 듣던 도중에 비염 수술과 우울증이 겹쳐 많이 힘들었던 이유도 있었고요.

어찌 되었든, 지방에 살던 저는 올해 4월, 아시아 태평양 언어학 올림피아드를 치러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따로 서울 구경도 못 하고 시험이 끝나자마자 다시 내려와서 좀 섭섭하기는 했습니다. 그 대회에서 저는 1, 3번 문제만 제대로 풀었던데다, 4, 5번 문제는 손조차 대지 못했습니다. 이 까닭에 저는 ‘아, 탈락했겠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또 몇 주 뒤에 받은 대회 결과는 다시 한번 저를 놀라게 했습니다. 제가 국내 3위의 성적으로 국가대표로 선발되었다는 것입니다. 뽑히게 되어 기뻤던 감정이 당연히 우세했으나, 솔직히 일이 이렇게 커진 데에 대한 위압감과 국가대표가 되었다는 부담감도 이에 못지않게 컸었습니다.

그렇게 다사다난했던 고등학교 3학년 1학기를 끝마치고, 저는 작은누나(동행자)와 함께 방학식 당일 서울로 향하는 기차를 탄 뒤 사촌 누나의 집에서 한밤 묵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비행기를 타고 런던 히스로 공항에 착륙했는데, 북서유럽 특유의 선선한 날씨가 참 좋았습니다. 런던은 명목상 경유지였지만 사실 즐길 건 다 즐기긴 했습니다! 자랑할 것이라면 언어학도들에게 성물이나 다름없는 로제타석을 두 눈으로 직접 보았다는 것과 아이작 뉴턴, 조지 프레더릭 핸들(영국으로 귀화하기 전의 이름은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 헨리 퍼셀,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우리가 아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막내아들로 런던에서 활동하였다고 합니다)의 무덤을 방문했다는 게 있습니다.

맨섬에 대해서 제가 가지게 된 인상을 짧게 표현하자면 이것일 듯합니다. 음식은 영국에서도 그랬듯이 맛이라곤 없었고 (특히 주최 측에서 나누어 준 치즈 샌드위치나 소금 식초 맛 감자칩은 여간 충격이 아니었지요…. 다만 도시락 말고 대회 장소의 급식은 맛있었답니다!) 시설도 열악했지만 (호텔 객실에서 좀이 나오고, 변기 좌석이 고정조차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풍부한 문화와(아일랜드어의 친척뻘인 맨어(Gaelg)라는 지역 언어도 존재하고, 켈트 문화와 바이킹 문화, 앵글로색슨 문화의 영향을 모두 받은 지역이랍니다!) 훌륭한 경관(중세 시대 바이킹들이 처음 세운 이후 수백 년 동안 쓰였던 필 성(Cashtal Phurt ny h-Inshey)과 역시 수 세기의 역사를 지닌 대회장 근처의 러션 성(Cashtal Rosien)이 존재하며, 자연경관도 매우 아름답습니다!)을 함께 지닌 곳이라고요! 시험은 캐슬타운(Balley Chashtal, Castletown)에 있는 King William’s College라는 학교 건물에서 치러졌는데, 19세기에 건축되어서 그런지 외관이 정말 웅장하더군요!

문제는 대체로 어려웠습니다. 둘째 날에 쳤던 개인전 얘기부터 해 볼까 합니다. 5번 문제의 경우 제가 좋아하는 역사 비교 언어학 분야에 속했지만, 하필이면 음운과 성조를 대응해야 하는 문제였던 터라 거의 풀지 못했고, 2번 문제는 손조차 대지 못하였으니까요. 제대로 풀었다 싶은 문제는 1번과 4번뿐이었는데, 그중 4번은 친족 호칭 문제였는데 의외로 매우 쉬웠던 기억이 납니다! 단체전에서는 생각지도 못하게 만주어 학습 교재인 청어노걸대가 예시로 나와 정말 놀랐습니다! 그렇게 저는 평소 배우고 싶다가 너무 어려워서 포기했던 만주 문자를 단 네 시간 만에 반강제로 떼게 된 것이었습니다…!

co시상식에서 저는 개인전 동메달, 단체전 장려상이라는 만족할 만한 성과를 받았습니다! 사실 동메달 중에서도 점수가 낮은 축에 속해, 메달을 받은 게 운이 좋았다는 생각도 했지요! 하지만 솔직히 단체전에서 메달을 따지 못한 건 조금 아쉽기도 했어요. 만주어와 한국어는 나름 어순도 비슷했던 언어라서 말이죠! 어찌 됐든, 저는 이러한 성과로 제 인생 처음이자 마지막 언어학 올림피아드를 장식했습니다! 내년 대회는 불가리아에서 개최된다던데, 기회만 된다면 동행자나 어엿한 팀 조교가 되어 이 여정을 함께하고 싶어요!

2022년 9월 1일
작성 | 권준혁
– 대륜고등학교 3학년 재학
– IOL 2022 Isle of Man 국가대표 (글 팀), 개인전 동상 수상
– APLO 2022 은메달, KLO 2020/21 장려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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