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OL 선발 안내 문자 (4. 16.)

제게 믿을 수 없는 날이 다가왔을 때는 4월 중순이었습니다. 아시아태평양언어학올림피아드(APLO) 시험을 치고 나서 성적이 발표되기 1주 전이었고, 중간고사가 시작되기 이틀 전인 토요일 오후에 갑작스레 문자가 왔습니다. “[한국언어학올림피아드]”로 시작하는 문자였고, 링크를 클릭해서 내용을 보자마자 저는 저희 반 교실을 축제 분위기로 만들었습니다. (기숙학교에 다니고, 또 2주마다 한번씩 귀가를 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있게 되었습니다.) 예선전이었던 한국언어학올림피아드(KLO)와 본선전이었던 아시아태평양언어학올림피아드(APLO)를 모두 부족한 시간 탓에 하루 전부터 준비했던지라, 예선전에서 장려상을 수상하고도 다음 기회를 마지막에서 두 번째로 얻었다는 사실은 예상 바깥의 일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때도 영국과 맨섬에서의 날을 꿈으로 꾸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8월에 이르기까지 제가 마주했던 것들을, 두서가 없을지라도 조금은 남겨보고픈 마음에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참가 수기보다 영국 기행에 가까운 글일지 모르겠지만, 열하루를 녹여낸 글이 조금이나마 먼 땅의 이야기를 나누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두서 없이 수기 아닌 수기를 적어 내려가봅니다.

저는 사실 언어학에 대해서는 조금 관심만 있었을 뿐, 결코 잘한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국가대표단으로 만난 다른 분들을 보니 이제는 좋아한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까도 싶습니다. 대회를 마치고 오니 저의 앎과 경험이 너무나 한정되었음을 뼛속까지 느낍니다. 조교님께서 말씀하시듯이 “언어는 곧 문화의 산실이며 상징권력”임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탐구를 소홀히 했었습니다. 언어학 올림피아드를 나가면서도 남들만큼 언어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 알던 것들을 다시 끌어오기에만 바빴고요. 조교님께서 카톡으로 남기신 편지에는 이어서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때로는 힘에 희생당할 정도로 유약하지만, 역으로 절대 굴복시킬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시스템도 붕괴시킬 수 있는 것이 언어인 것 같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언어학에 대한 열정을 크게 느낀 때는 외국에서보다도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였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언어학적 사고 비스무리한 생각을 했던 것은 초등학교 졸업과 중학교 입학 전후에 영어 단어의 어원을 찾으면서였고, 조금씩 비슷한 단어들을 가져와 보며 이미 다른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이 찾았을 언어의 유형과 차용어 알아보기 같은 활동을 했을 때로 기억합니다. 본격적으로 무언가를 해 보기 시작했던 것은 인도유럽조어(PIE) 이야기를 우연히 알게 되고, 또 여러 인공어를 접한 이후였습니다. 저도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자신감에 언어체계를 스스로 만들어 보기도 하고, 학교 국어시간과 영어시간에 언어학적 사고를 끄집어내보려 노력하던 일들이 깊이는 얕았지만 적어도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할 수 있던 일이 아니었을지 생각해 봅니다. 그 바깥에도 문법적 성, 젠더와 말하기 습관, 정치적 올바름(PC) 운동을 비롯한 사회언어학의 측면에도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졌던 것이, 비록 탐구의 열정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어도 언어학적인 사고를 멈추지 않으려 했던 노력이었음을 되돌려 봅니다.

다시 APLO에서 IOL 사이의 기간으로 돌아와 보면, 대회보다도 그 앞에 붙어 있던 여행 일정에 들떠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올해는 대회 전 며칠동안 런던과 옥스퍼드를 다니며 많은 것들을 보았는데, 6월에 발표된 여행 계획은 바쁜 일정에 시달리던 제 마음을 달래 주었던 것 같습니다. 7월 초 이른 방학을 맞고 비행기가 뜰 날이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제 가슴은 훨씬 부풀게 되었고, 그렇게 여행가방에 짐을 싸면서, 가끔씩 올라오는 언어학 이야기에 재미를 느끼기도 하면서, 날짜가 저도 모르는 새에 넘어가는 듯 보였습니다. 여행 전날 6시 정각에 맞추어 말을 놓기로 한 제안과 그 뒤로 이어진 자기소개, 서로 공유할 수 있었던 이야기보따리를 열어보며 같이 웃었던 2시간 반의 채팅 기록은 종종 생각날 때면 다시 내려보기도 합니다. (6시가 되기 20분 전에 그 제안이 올라왔었는데, 다시 그 이야기를 꺼내 보면 3년 전의 일 같다고 회자되었던 것 같습니다.)

카카오톡 대화로만 이야기를 주고받던 저희가 만난 곳은 인천공항이었는데, 화면상으로만 말하던 사람들이 눈앞에 나타나니 다시 어색해져 반말을 하던 사람끼리 다시 존댓말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같이 사진을 찍고 통성명을 하며 친해져 보려는 노력을 했던 기억은 있던 것 같습니다. 그 뒤로 복잡한 출국 절차를 거쳐 열네 시간의 긴 비행을 하고, 지친 몸을 이끌어 호텔에 도착하기까지의 길들이 지금도 선명하게 보입니다. 영국에 도착한 첫날만 해도 열흘 뒤에 더 있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하며 헤어질 것은 생각하지 못했지요.

푹신한 침대에 엎드려 있다가 눈 깜짝할 새에 잠이 들어버린 날들을 뒤로 하고, 지하철을 타며 런던의 온갖 곳을 돌아다니던 사흘을 생각해 봅니다. 영국으로 같이 날아온 아홉 사람을 이끌어주시던 조교님이 아니었다면 생각하지 못할 여행이었던 것 같은데, 셀룰러 신호가 잡히지 않던 지하에서 서로 엇갈렸던 때나 열차 문이 열리지 않아 내리려던 곳에서 한 정거장을 더 갔던 일도 기억에 남았습니다. (이때 조교님께서 호텔을 지나쳐 그 역까지 걸어와 주신 일은 감동이었고요…) 걸었던 곳들의 이야기는 사진으로 갈음할 수 있다고 하지만, 같이 먹고 걸으면서 나눴던 이야기들은 글에 담기가 너무도 어려웠습니다. 각자 다니는 학교가 어떤지 물어보기도 하고, 언어학을 소재로 말하기도 하다가, 며칠이 지나서는 고민까지도 들어줄 정도로 사이가 가까워졌던 것 같더군요.

옥스퍼드를 갔다가 돌아온 사흘째의 밤에는 단체전 연습을 한번 했는데, 여행에 정신이 팔렸던 저로서는 3시간의 모의 연습이 쉽지 않았습니다. 호텔 로비에 앉아 배달된 저녁을 먹으면서 음운론에 관한 문제 하나를 풀었는데, 쉽게만 생각했던 음운론의 세계가 험난하고 가파른 절벽이었다는 사실을 몸소 느끼게 되었지요. 또 한편으로 맨섬에 가기 전까지 누구도 알 수 없었던 점이, 여행 중 런던에 비가 한번도 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대회가 끝난 지금에 와서는 비가 제 답안지가 아닌 런던에 왔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도 보지만, 그래도 그 덕에 어려움 없이 런던 시내를 잘 다녔던 듯합니다.

맨섬 공항에 내린 뒤 처음 마주했던 표지판. 이곳에서부터 공항이 아주 작았음을 실감했습니다.

작디작은 비행기를 타고 맨섬에 도착했을 때는 비가 추적추적 내렸습니다. 폐막식 때 들은 이야기로는 맨섬을 지키는 신이 IOL 대표단을 경계의 대상이 아닌 손님으로 맞아 주어서 월요일부터 하늘이 개었다고 하는데, 공교롭게도 폐막식이 끝나고부터 토요일까지도 비구름이 맨섬 하늘을 삼키니 맞는 이야기인 듯싶습니다. 같은 비행기에서 내린 브라질 팀과 사진을 찍고, 호텔에서는 브라질 팀과 스위스 팀과 수다도 떨어 보며 국제대회가 이런 것이구나, 하는 느낌을 하루만에 알 수 있었습니다. 스위스의 국가대표 선발전에 한국 동요 ‘곰 세 마리’가 나왔다는 이야기에 놀라도 보고, 제 영어가 생각보다 좋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하며 맨섬에서의 첫날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월요일의 개막식과 화요일의 개인전은 각기 다른 면에서 충격을 주었습니다. 개막식이 웃음으로 충격을 주었다면 개인전 문제들은 그 난도와 언어적 특성이라는 다른 방향으로요. 6시간동안 풀어도 다 풀지 못할 문제들을, 그리고 그 사어와 사멸위기언어 들을 찾아서 정리하신 출제자 분들께 다시 한번 경의를 표합니다. 하지만 개인전이 끝난 날 저녁에 있었던 콘서트에서 다같이 흥에 겨워 춤을 추기 직전에, 6시간의 대장정을 “cracking codes”라고 표현하신 악사 분의 말도 적잖이 기억에 남던 것 같습니다. 언어학 올림피아드의 컨셉을 정확히 말하면서도 그 다섯 문제를 그렇게 두 단어로 일축하리라곤 생각을 하지 못해서겠지요. 점점 빨라지는 템포로 많은 사람들이 분위기에 취해 가면서 춤을 출 수 있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끝날 때쯤에서야 가운데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게 아쉽기는 하지만, 일요일의 대화와 큰 방 2개를 고사장으로 쓰는 화요일의 일에 이어 국제대회가 무엇인지 다시금 알려주는 것 같았습니다. 한편 단체전이 끝난 목요일에도 춤을 추기는 했었는데, 그때는 가운데로 들어가려고 하다가 무언가 복잡해지는 낌새에 뒤로 도망을 갔던 장면이 머릿속에 아직도 살아 있더군요.

수요일의 모노폴리 관전.

이렇게 정신없을 IOL 기간 와중에도 한국 팀을 묶은 또 하나의 역병(?)이 하나 있었습니다. 퍼즐을 사랑하던 한 팀원이 하던 게임을 언제부턴가 저희 모두가 하게 되어 그 게임으로 금요일까지 재밌게 놀았던 기억이 있네요. 조건에 맞게끔 그리드에 벽을 채우는 간단한 퍼즐이었는데, 다른 나라 팀과의 교류를 뒷전으로 해 놓고도 한자리에 앉아서 즐길 정도였으니 조교님께서 ‘역병’이라고 표현하셨던 것이 거짓말이 아니었습니다. 덕분에 한국 팀끼리는 공동의 이야깃거리가 하나 더 생기게 되기도 했지요. 다른 놀거리로 문화 체험을 했던 수요일 저녁에 몇 명끼리 모여 했던 맨섬판 모노폴리도 즐기면서 보았고(저는 중간에 들어왔던지라 관전을 했었는데, 관전만으로도 충분히 웃음배는 채우기 좋았습니다), 금요일 저녁쯤에는 세계일주를 테마로 한 보드게임을 직접 하기도 해 보면서 작은 게임들로도 며칠을 즐겁게 보냈습니다.

시험이 없던 때에는 걷고 대화하면서 맨섬 곳곳을 돌아다녔습니다. 워낙에 작은 섬이었어서 4차선 이상의 도로를 보기 힘들었는데도, 수많은 볼거리가 있었다는 데에 적잖이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마저도 북쪽 절반은 시간상 갈 수 없었더니 더욱더요. 가는 곳마다 마치 300년 전을 보는 듯한 풍경이 펼쳐졌고, 성 안에 있을 때는 그보다도 훨씬 옛날의 맨섬을 그려보았습니다. 목요일 오후 단체전이 끝나고 갔던 러션성(Castle Rushen)을 나오면서는 단체사진을 찍으며 성에 우끄라이나 깃발과 함께 IOL 깃발이 걸린 것을 보았고, 개막식이 끝난 뒤에는 맨섬의 깃발 사이에 IOL의 것이 하나 놓여 있는 일도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맨섬 속에서 여러 나라 사람들이 모였다는 사실을 다시금 자각하며 섬에서 “IOL”이라는 대회 이름을 꽤 자주 되뇌던 것 같습니다.

러션성에서 찍은 단체사진. 위쪽에는 우끄라이나의 국기와 이번 IOL의 깃발이 나란히 있습니다.

언어학 올림피아드의 묘미라고 하는 단체전은 다른 대회들과 달리 말하면서 문제를 풀 수 있다는 것 밖에도 여러모로 재미있고 흥미로운 점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장장 아홉 페이지에 달하는 어디에서도 볼 수 없던 문제, 4명이서 작업을 분배하고 문제를 풀고 간식을 나누는 4시간동안 그렇게 집중했던 경험은 여태까지 해볼 수 없었습니다. 간식 꾸러미를 꺼내놓고 시험지가 든 봉투 겉면에 “답안 이외의 내용은 필요하지 않으며, 채점되지도 않는다.”라는 문구를 읽자마자 놀란 10시 30분부터, 가능한 답안을 어떻게든 적어내려고 했던 14시까지 한시도 긴장을 놓지 못했던 것 같군요. 이렇게 하루를 태워 가며 보내다 보니 호텔에 들어와서 씻기도 전에 잠이 들어 버리는 날이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쏜살같이 지나가는 시간을 잡으려고 했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일은 마음같이 안 되었습니다.

폐막식에서 문제의 해설을 발표할 때는 적어냈던 규칙들이 하나하나씩 비껴나가는 순간을 아주 많이 마주했습니다. 언어학을 좋아한다고 하면서도 사고방식은 다양화시키지 못해 유럽적으로 머물러 있었기에, 생각을 바꾸어 풀 수 있던 많은 부분을 놓첬던 것입니다. 처음 보는 기호에 당황해서 다른 사람들이 모두 쉽게 푼 것을 풀지 못하기도 했고, 소재가 생소해 접근조차 어려웠던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랬기에 개인전 시상식에서 이름이 불리지 않았을 때에는 아쉽지만 당연한 결과라는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한국 대표단 사람들이 좋은 성적을 거둔 것을 보면서도, 저 개인적으로는 이번 IOL에서 ‘노력요함’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캐슬타운에 있는 학교로 돌아와 금요일 저녁에 있었던 가라오케 행사를 멀찍이서 지켜보면서, 다른 나라 사람들과도 어느 정도 친해질 수 있었습니다. 팀원들과 같이 다닌 덕에 만난 사람이 많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더 편하게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었어요. 다음 해에는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반쯤 아쉬운 마음으로 한국행 비행기를 탔던 것 같습니다. “해산”을 외칠 때에도 발이 떠나지지 않아 조금이라도 더 이야기하다 가려고 했고요.

열하루를 함께하고 도합 24시간을 넘는 비행을 같이했던 한국 대표팀에도 참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온 열한 사람, 맨섬에서 만났던 다른 조교님들까지 포함하면 열넷이 함께 다니면서 다른 길을 지나온 분들의 대단함을 먼저 피부로 느꼈던 것 같습니다. 인천에서 다시 인천까지 이르는 길에 좋은 사람을 너무도 많이 만났고, 또 부족한 저에게 많은 도움과 격려를 주셔 어떻게도 온전히 전할 수 없는 감사의 인사를 이 자리를 빌려 다시 드립니다. 여러 사람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고 많은 것을 보았습니다. 다른 분들의 손길이 없었더라면 이리 잊을 수 없는 경험은 얻지 못했을 성싶습니다.

2022년 9월 1일
작성 | 이상준
– 대전과학고등학교 1학년 재학
– IOL 2022 Isle of Man 국가대표 (말 팀), 단체전 장려상
– APLO 2022 동메달, KLO 2022/23 장려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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