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저는 제18회 국제 언어학 올림피아드에 참가했던 이승현입니다. 언어학 올림피아드에 참가했던 제 경험과 기억을 남기고 싶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저는 언어학에 관심이 있어 언어학과를 지망하는 학생입니다. 중학생 때부터 다양한 외국어에 관심이 많았고 자연스럽게 언어들 간의 유사성이 보이자 언어학이라는 학문에 다가간 것 같아요. 어족을 분류하고 서로 다른 언어들의 같은 뿌리를 찾는 역사비교언어학에 흥미를 느꼈던 거죠. 처음 일본어를 배울 때는 한국어랑 발음도, 어순도 같은 것이 신기했지만 둘이 같은 어족이 아니라는 것에 더 놀랐습니다. 프랑스어를 배우면서는 영어의 몇몇 고급 어휘들이 프랑스어에서 왔다는 것이 -비록 같은 어족은 아니지만- 재미있는 부분이었습니다. 첫 시작은 역사비교언어학에 대한 흥미였지만, 이내 언어학의 다른 분야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프랑스어의 직접목적보어 대명사는 동사의 앞에 위치한다는 간단한 문법을 배우며 통사론 등에도 관심이 생겼죠. 마침 학교에 언어학 동아리가 있었기에 참가할 수 있었고, 담당 선생님께서는 학생들끼리 토론을 통해 언어학의 논쟁거리들을 논해볼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그 중 기억에 남는 것은 ‘언어가 사고를 지배한다’라는 사피어-워프의 가설이었어요. 저는 사피어-워프의 가설 찬성 측으로 토론에 들어갔는데, 이미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 났던 것이라 무참히 상대 측에게 패배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왜 이미 결과가 정해져 있는 주제를 주신 것인지 제시해주신 선생님을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지금은 아주 감사한 마음이죠!

언어학 동아리 활동을 하고 1년 뒤, 한국 언어학 올림피아드 홍보지가 학교에 게시되었습니다. 마침 언어학을 좋아하던 터라 즐길 기회라고 생각해서 신청했죠. 언어학 올림피아드는 언어학의 기본적인 지식을 묻는 것이 아니라, (그랬더라면 한국의 입시처럼 예상 기출 문제를 찍어서 공부하는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생소한 언어를 제시하고 그 언어 퍼즐을 풀도록 하는 거예요. 주로 제시된 언어 문장과 번역된 문장을 주고 규칙을 찾아내도록 하거나, 같은 방식으로 순서를 섞어놓거나, 하는 방식입니다. 제 어머니께선 문제를 보고 IQ 테스트 같다고도 하셨습니다. 학교 선생님들께선 제가 올림피아드에 나간다는 사실을 듣곤 부담 없이 하라고 격려의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사실 잘 보겠다는 생각은 없이, 즐기겠다는 생각으로 임했던 것 같습니다. 공교롭게도 기말고사 기간과 겹쳐, 공부할 시간이 많이 없었거든요. 한국 언어학 올림피아드는 비대면으로 개최되었습니다. 제 방에서 노트북으로 줌(zoom)을 켜고 카메라 각도를 맞춰가며 혹시 시험지 밀봉을 잘못하면 어쩌나 떨었던 것이 생각나요. 다시 돌아보니 모두의 언올도 참가했더라면 참 좋았을 것 같아요.

한국 언어학 올림피아드에서 아시아 태평양 언어학 올림피아드에 참가할 기회를 얻게 되어 다음 단계도 도전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사이 저는 사회언어학에 관심이 생겨 사피어-워프의 가설과 언어상대론, 그리고 혐오표현을 주제로 보잘것없지만 교내 학술대회 상을 탔습니다. (제가 사회언어학이라는 학문을 알게 된 계기인 김하수 교수님의 <거리의 언어학> 책을 추천합니다. 혐오표현과 관련해서는 김지혜 교수님의 <선량한 차별주의자>를 추천해요) 제 아시아 태평양 언어학 올림피아드 출전에 관해서 부모님과 선생님은 조금 걱정하는 투이셨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이고, 공부를 해야 하는데 괜찮겠냐는 것이었습니다. 어른들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제가 나가고 싶다고 다짐한 것은 역시 제가 좋아하는 분야이기 때문이었지요. 어디까지나 순수한 즐거움이었습니다. 아시아 태평양 언어학 올림피아드 전에는 겨울학교와 통신교육을 마련해주셨는데, 일정 상 겨울학교는 듣지 못하고 통신교육만 들었습니다. 겨울학교도 들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남지만, 국제 언어학 올림피아드 참가자분들과 이야기하다 보니 저처럼 겨울학교는 듣지 못했다는 분들도 많더라고요. 통신교육 수업은 언어학 올림피아드 문제들을 유형별로 풀이 방법을 알려주시고, 그 유형의 문제들을 숙제로 내주시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물론 비대면으로요. 조교님들께서 답안을 꼼꼼히 봐주신 것이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수업을 들었던 것이 도움이 되었던 것 같아요. 아시아 태평양 언어학 올림피아드도 한국 언어학 올림피아드와 같이 비대면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사실 정신이 없어서 시험을 어떻게 봤는지는 기억이 안 나요. 하지만 5시간의 긴 시험을 치르고 나서 꽤 잘 봤을지도 모르겠다는 자신감이 들었던 건 확실합니다. 모르는 문제는 과감히 버리고 풀이를 열심히 쓰는 데에 초점을 맞췄거든요. 아시아 태평양 언어학 올림피아드도 중간고사 기간과 겹쳤지만, 다행히도 성적에는 지장이 없었답니다. 걱정과는 달리, 제가 정말로 좋아하는 걸 한다면 일이 잘 풀릴 거라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국제 언어학 올림피아드에 출전하게 되었는데, 국가대표라는 호칭이 붙으니 어깨가 무겁게 느껴지는 건 사실이었습니다. 그동안은 즐겼는데 뭐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부담감이 없지 않아 있었죠. 국제 언어학 올림피아드에서는 처음으로 다른 참가자분들과 만날 수 있었는데, 라트비아 벤츠필스에 나가지 못하게 된 건 정말 아쉽습니다.

KLO에서는 장려상, APLO에서는 은메달, IOL에서는 수상을 하지 못함으로써 가장 실적이 낮긴 했지만, 역시 IOL이 가장 기억에 남고 즐거운 경험이 되었던 이유는 다른 분들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관심 분야가 같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국가대표로 모인 8명은 정말 가지각색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고작 1박 2일밖에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쌓은 추억이 정말 많아요.

개인전 직전, 첫 만남은 정말 어색했습니다. 통성명과 나이 등 간단한 개인정보를 교환하고 잡담… 이때까지만 해도 친해질 줄 몰랐는데 말이죠. 각자 핸드폰만 보느라 바빴습니다. 하지만 개인전 후 답을 맞춰보고, 2시간이나 더 핸드폰 없이 갇혀있으니 (원격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마지막 국가가 시험을 시작할 때까지 외부와 연락은 차단되었습니다) 저절로 친해지게 되더라고요. 기억에 남는 건 조교님들과 참가자분들의 추천으로 깔린 외국어 노래 BGM이었는데, 좋은 노래를 많이 들었지만 제목이 기억에 남는 것이 얼마 없어서 언올 플레이리스트가 필요하다고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유일하게 제목이 기억에 남는 Eivor의 페로어(덴마크령 페로 제도에서 쓰이는 언어) 노래인 Verd Min은 가끔씩 듣습니다. 2시간의 감금 시간 동안 zoom 대화방에 있는 다른 국가의 참가자들과 작은 화면으로 겨우 소통했던 것도 즐거운 기억이었습니다. 베트남 대표팀은 카메라 앞에서 한국 아이돌 춤을 춰주고, 중국 대표팀과는 건배를 했죠. 오프라인에서 만났더라면 더 즐거웠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화면만으로도 아주 친해졌습니다. 개인전은 오후 1시에 시작해서 7시에 끝나고, 9시가 되어서야 호텔로 갈 수 있었습니다.

2일 차 오전에는 단체전 연습을 하면 좋았겠지만, 다들 각자의 시간을 갖는 듯했습니다. 조교님께서도 단체전은 부담 없이 즐겨도 된다고 하셨어요. 비록 단체전인 만큼 분량은 더 많았지만, 팀원들이 함께 문제 하나를 풀기 위해 협력했던 순간이 소중했던 것 같습니다. 단체전 문제는 공통 조상을 가진 세 개의 언어를 가지고 최대한 많이 분석해내는 것이었습니다. 시간에 쫓겼지만 최선을 다해 풀었다고 생각해요. 단체전이 끝나고는 기역 팀, 니은 팀이 함께 마피아 게임을 했는데, 사실 올림피아드 시험 자체보다 마피아 게임이 매우 재미있었던 것이 기억납니다. (zoom 채팅방에 있던 카자흐스탄 친구도 한국팀이 마피아 게임을 하는지 알고 있었나 봐요) 개인전이 끝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zoom 채팅방에서 카자흐스탄 대표팀과 만날 수 있었습니다. 화면으로 손 하트를 주고받고, 그마저도 아쉬웠는지 인스타그램 아이디도 나누었습니다.

무엇보다 국제 언어학 올림피아드가 좋았던 이유는 앞에도 언급했지만 다른 분들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올림피아드가 끝나고 돌아갈 무렵 ‘5박 6일 했어도 좋았을 것 같다’라는 아쉬운 소리가 나왔을 정도였으니까요. 제게는 길이길이 추억이 될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아쉽게도 이번이 마지막 언어학 올림피아드였지만, 기회만 된다면 다시 참여할 만큼 즐거웠습니다. 저는 앞으로 대학에 진학해 언어학이라는 분야를 더 깊이 공부해보려 합니다. 이번 언어학 올림피아드에서 만났던 분들도 멋진 모습으로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020년 8월 1일
작성 | 이승현
– 대일외국어고등학교 3학년 재학
– IOL 2021 Ventspils 국가대표 (니은 팀)
– APLO 2021 은메달, KLO 2020/21 장려상

답글 작성이 허용되지 않습니다.